숲과나눔 ‘초록열매 종이팩 컬렉티브’
지역 맞춤형 종이팩 자원순환 모델 개발
올해 경기도 시흥시 능곡동의 아파트 단지 6곳에서 처음으로 ‘종이팩 수거함’이 설치됐다. 이전에는 종이류에 섞여 폐기되던 종이팩들이 이제는 수거함에 하나둘씩 쌓이고 있다. 지난 3월 한 달 동안에만 300kg이 모였다.
이 같은 변화는 지난해 10월 재단법인 숲과나눔이 지역에서 종이팩 재활용률을 높이기 위해 기획한 ‘초록열매 종이팩 컬렉티브’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국내의 종이팩 재활용률은 2022년 기준 13.7%에 불과하다. 스웨덴(80%), 대만(70%), 미국(60%), 캐나다(56%) 등 해외 주요국과 비교하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숲과나눔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기환경운동연합 활동가들과 함께 시흥시 안에서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자원순환 모델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종이팩 재활용도 ‘지역 맞춤형 모델’로
활동가들은 시흥시 내 100여 개 아파트 단지에 연락을 돌리며 프로젝트에 참여할 단지를 모집했다. 한국멸균팩재활용협회와 멸균팩 제조사인 테트라팩은 수거함 설치 비용을 댔다. 시흥도시공사는 수거된 종이팩을 공공선별장으로 옮기고, 재활용 기업으로 넘기는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재활용 기업을 거쳐 제지공장에 도착한 종이팩은 화장지나 판지로 재탄생했다. 숲과나눔이 기획한 민관 협력의 자원순환 고리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이팩은 겉보기엔 종이처럼 보이지만, 내부가 비닐이나 알루미늄이 코팅돼 있어 재활용을 하려면 종이와 다른 공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환경부 지침에 따라 일반 종이류로 배출되고 있어 대부분의 종이팩은 매립되거나 소각된다.
최근에는 프로젝트를 시흥시 전역으로 확대하기 위한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9일 열린 시민토론회에서는 종이팩 자원순환 체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확산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안들이 논의됐다. 김현정 경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종이팩을 분리배출하는 아파트 단지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종이팩을 정식 공공수거품목으로 지정하는 조례 제정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종이팩 자원순환 시스템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전북 전주시, 서울 서초구 등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다만 지역 사정에 맞게 조금씩 모델이 다르다. 전주시는 특정 권역의 모든 쓰레기를 한 업체가 책임지는 ‘권역별 청소책임제’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 체계에서 종이팩을 제외하기로 했다. 종이팩을 따로 수거할 수 있도록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한 셈이다. 지난해부터 130개 아파트 단지, 10만 가구를 대상으로 종이팩 수거함을 설치했고, 종이팩은 권역에 상관없이 민간 재활용 업체인 사람과환경이 일괄 수거하기로 했다.
제도적 기반은 마련됐지만 수거량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숲과나눔은 전북환경운동연합과 함께 주민 대상으로 인식 개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아파트 단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종이팩 분리배출의 필요성과 방법을 안내하는 식이다. 허그림 숲과나눔 캠페이너는 “홍보 부족으로 여전히 많은 주민이 종이팩을 예전처럼 종이류에 섞어 버리고 있었다”면서 “단지별로 주민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회수율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시는 올해 상반기 안에 전주시 전체 아파트인 600여 단지에 종이팩 수거함 1만 개를 설치해 사업 규모를 확대할 예정이다. 수거를 맡은 사람과환경은 종이팩을 일반팩과 멸균팩으로 자동 분류하는 ‘광학선별기’를 설치해 선별 작업의 효율을 높일 계획이다. 이렇게 선별한 종이팩을 전주시에 있는 제지공장으로 보내 지역 내에서 자원순환 체계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종이팩 구분 없는 환경부 지침, 개정 이뤄질까
서울 서초구에서는 민간 수거업체인 천일에너지가 기존에 관리하던 79개 아파트 단지, 약 3만3000세대에서 종이팩 수거에 나섰다. 서초구 전체 아파트의 약 38%에 해당하는 규모다. 허그림 캠페이너는 “기존 민간업체가 수거와 선별을 맡기 때문에 순환체계 구축에 드는 비용이나 행정 절차가 크게 줄었다”면서 “다른 지자체로도 확산하기 좋은 모델”이라고 말했다. 숲과나눔은 더 많은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 주민 설득에 나서고 있다. 서울시와 서초구도 관리사무소에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는 등 행정적인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기업의 참여도 적극적이다. 테트라팩은 한국멸균팩재활용협회와 함께 시흥시, 전주시, 서울 서초구의 종이팩 수거함 설치비용을 후원했다. 사회공헌 사업으로 서울시 공동주택 약 1만 세대에 종이팩 전용 수거함 설치 비용을 지원할 계획이다. 또 멸균팩도 재활용이 가능한 자원임을 알리는 온오프라인 캠페인을 전개하고, 종이팩 자원순환 모델 확산과 지속가능성을 위해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공론장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숲과나눔이 ‘초록열매 종이팩 컬렉티브’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2023년 7월이다. 숲과나눔이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함께 진행하는 이 사업은 자원순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발굴하고 정책까지 개발하는 통합 프로젝트다. 당시 광주의 시민단체 ‘카페라떼클럽’이 시작한 ‘종이팩은 종이가 아니다’ 캠페인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시민 자원봉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종이팩을 모아 행정복지센터로 가져다주는 활동이 곳곳에서 진행됐다. 행정복지센터에서 종이팩을 화장지나 종량제봉투로 교환했고, 봉사자들은 이를 복지시설과 같은 마을 기관에 전달했다. 숲과나눔은 이런 산발적인 실험들이 체계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지원에 나섰다.
1차년도에는 학교, 아파트, 카페, 마을 단위로 나눠 실태조사와 회수실험이 진행됐다. 또 매달 열린 정책포럼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모여 현행 시스템의 문제점을 짚고 해외 사례를 공유하며 솔루션을 모색했다. 1차년도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지난해 6월에는 그동안의 성과를 바탕으로 환경부에 5가지 정책안을 제안했다.
환경부는 ▶︎종이팩 재활용 인정 범위 확대 ▶︎지자체 종이팩 수거 의무 강화 ▶︎종이팩 재활용 제품 시장 활성화 ▶︎종이팩 분리배출 홍보와 인식 개선 등 4가지 제안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답했지만 ▶︎종이팩을 별도 수거품목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지침 개정 요구에는 ‘선례가 없어 기존 쓰레기 수거 시스템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숲과나눔은 2차년도 사업에서 프로젝트의 방향을 재조정하고, 지자체와 함께 지역 맞춤형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오는 22일에는 2차년도 사업에 대한 성과공유회가 열린다. 숲과나눔은 이날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환경부에 지침 개정을 다시 요구한다는 계획이다. 이지현 숲과나눔 사무처장은 “민간이 예산과 인력 등 노력을 들여서 공공에서 작동할 수 있는 종이팩 자원순환 모델을 만들어낸 의미 있는 시도”라며 “환경부가 관련 지침을 개정하면 이번에 개발된 모델을 각 지자체가 지역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25년 5월 8일 최지은 기자
출처: 중앙일보 (https://www.thebutter.org/news/articleView.html?idxno=1274)